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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학문을 뭘로 아는가?

이 글은 필자가 2001년 12월 3일 새벽 2시 13분 38초에 나우누리 Linux 동호회 게시판에 올렸던 39976번 글을 추가 편집한 것입니다. 필자 스스로 상기 게시판의 글은 지웠기 때문에 현재 게시판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얼마 전 모 대학에서 단과대 신설 기념 행사가 있었습니다. 전산과와 전전전이 중심이 되어 소위 ‘정보통신대학’인가 하는 잡스러운 이름으로 독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대학의 전산과는 아직까지 이과대학에 속해있었습니다.

높으신 양반들이 많이 왔더랬습니다. 대학 총장님, 차관급 인사, 국회의원, 모 IT 업체 사장, 모 언론사 사장 등등……. 그리고 그날 그들이 토한 열변을 들으며 저 또한 ‘토’할뻔 했습니다. 소위 윗대가리라는 인간들이 대학과 학문에 대해 어떤 컨셉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으면서, 곧 망해버릴 이 나라를 가능한 한 빨리 내팽개치고 학자가 설 수 있는 땅으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절망적이더군요.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그들의 논지는 하나같이 산업화, 부가가치 창출, 사업상의 성공, 그리고 산업인력/기능인력 양성에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학문 본연의 자세와 가치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고,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학의 연구 기능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고, 보다 먼 미래를 기약하는 후진 학자 양성 기능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체 대학을 뭘로 아는건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수많은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이 (강제로) 모여든 대강당에서, 그들이 언급한 ‘존경하고 본받고 닮아야할 인물’은 성공한 (훌륭한?) 사업가인 B. Gates였습니다. 혹시 이곳이 Linux동이기에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하여 덧붙이자면, 만일 그들이 Gates 대신 S. Jobs나 심지어 L. Torvalds를 언급했더라도 제 불쾌감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리동에서 이들 세 사람을 한 데 묶어 싸잡아 얘기하는 것이 참 죄송스럽긴 하지만, 솔직히 제 시각으로 보자면 이들은 모두 산업상의 패러다임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거나, 조금 좋게 말해준다고 해도 그저 엄청 실력있는 엔지니어일 뿐, 결코 ‘학자’로서 우대받을 인물들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들을 학자라 칭한다면, 진정 훌륭하고 존경받을만한 computer science 계의 거장들에게 너무나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그 ‘높으신 양반들’ 중 어느 누구도 John von Neumann이나 Alan Turing, Alonzo Church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Computer science를 연구하는 ‘대학’에 와서 말입니다! Edsger Wybe Dijkstra나 Haskell B. Curry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고, Donald E. Knuth의 이름 또한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21세기 한국에 기여할 여러분의 미래’로 예를 든 이름이 모 사업가(그것이 Gates든 Jobs든)의 이름이라니! 대학을 무슨 예비 CEO 양성 기관 쯤으로 아는 모양입니다. 솔직히 모욕적이었습니다. :-(

대학은 1차적으로 연구 기관이고, 부수적으로 후진 양성 기관입니다. 그리고 대학이 연구기관으로서 기업체 연구소들과 다른 점은, 대학의 연구는 그 연구 결과가 창출할 부가가치나 일체의 파급 효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점이고, 또 자유로워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기업체 연구소에서 돈 안되는 연구를 하는 연구원을 푸대접하는 것은 그나마 이해합니다. 그 기업의 안목이 근시안적임을 탓할 일이긴 하나, 그런 점을 차치하고 본다면 일단 기업의 생리상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없는 연구를 지원하지 않는다하여 그 기업의 마인드를 도마위에 올리는건 좀 가혹하다는걸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학만은 다릅니다. 왜 대학이 기업체 연구소가 아닌 ‘대학’인지 너무들 잊고 있는 것같습니다.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학회에서 박수를 쳐주는 논문이라면, 그 박수만으로도 이미 그 논문의 가치는 십분 인정받은 것이고 그 논문을 쓴 교수는 훌륭한 학자입니다. 그리고 그런 연구를 지원해준 대학은 충분히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것입니다. 연구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냐구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돈이 없는 한 돈 안되는 연구를 지원할 수는 없다는 마인드가, 바로 지금 제가 통탄하고 있는 마인드입니다. 이 나라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후진 양성 기능도 그렇습니다. 대학을 간판 따러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보호자의 요구에 따라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높으신 양반들 말대로 ‘직업 훈련 받으러’ 들어가는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이 대학을 어떤 생각으로 대하고 활용하든, 그건 각 개인의 가치관으로서 존중받아야할테니 제가 뭐라고 토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토를 달아선 안되겠죠. 그러나, 대학을 운영하는 이사장이나 대학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 그리고 대학생들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제 1선에 있는 교수님들은 그 마인드를 올바르게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학은 학자 집단입니다. 과학(science)과 공학(engineering)의 차이는 이 글의 논지를 조금 벗어나므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과학이 됐든 공학이 됐든 양 분야 모두에 있어서 학자가 존재하고 기능인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대학은 기능인 집단도 기능인 양성소도 아닌 ‘학자 집단’이자 ‘학자 양성소’입니다.

그 날 그 높으신 양반들은 아무래도 발언할 장소를 잘못 골랐던 듯합니다. 그렇게 돈 잘 버는 인력이 탐났으면 벤쳐 사업가들을 모아놓고 연설했어야합니다. 기능 인력이 그렇게 탐났으면 학원에 가서 떠들었으면 되는 일입니다. 돈 되는 연구와 사업 구상이 그렇게 탐났으면 기업체 연구소들을 찾아가 격려할 일이었죠. 대학에 왔으면 “부가가치 따위에 목 매지 말고 자유로운 연구와 학문적 자세를 견지하라”고 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Turing과 Church와 Curry를 숭상하는 전산과 대학에 찾아와, 감히 성공한 사업가를 본받으라는 망발을 하더군요. 이 땅에서 돈 안되는 순수 학문을 하는 학자 나부랭이의 씨를 말려버리겠노라는 강한 의지가 보이는 것같아 섬뜩하기까지 했습니다.

겉보기엔, 아니, 산업화의 정도나 돈벌이만을 척도로 재 보면,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서양 선진국의 수준을 따라가고 있는 듯한 착각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한때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 실은 관심이 없어서) 반도체 산업에서 호황을 누렸으며, 네트웍 기간망도 (그 기반이라는게 게임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여러 나라의 부러움을 살 만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그들이 간 길을 탄탄히 밟아가고 있는 걸까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쌓아온 ‘돈 안되는’ 순수 학문의 반석이 튼튼했기에 그 위에 고도 산업화와 부가가치 창출의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석의 겉모양만을 되는 대로 집어와 자갈밭처럼 깔아놓고, 그 위에 위태위태한 산업화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진작에 무너졌어야 정상인 사상 누각을 말입니다.

최근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전부터 “이 땅에 학자가 설 자리는 없다. 공부를 정말 계속 할 생각이라면 박사 과정은 외국으로 나가라”라고 하고 계신데, 정작 저는 코쟁이들이랑 같이 살기 싫다는 단순한 게으름으로, 어찌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죠. 그 날 그 높으신 양반들의 열변을 들으며 이제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석사 끝나면 나갈겁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안 돌아옵니다. 학자가 설 땅이 코딱지 만큼도 없는 나라, 모든 가치의 척도를 돈으로 매기는 나라,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이 빌어먹을 나라는 망하든 말든 내팽개칠겁니다. 대신 학문의 순수함을 인정해주는 곳에 가서, 쥐꼬리만큼의 최소 생활비만으로 연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연구의 자유와 가치를 보장받으며 살고 싶습니다.

PS 1: 저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 시비를 걸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위 글에 나온 비난조의 문장들은 대학을 바라보는 각 개인의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학이 가져야하는 최소 조건을 만족시킬 생각이 없는 높으신 양반들을 향한 푸념일 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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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cation: Thu 05 Jan 2006 06:01:48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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