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문서는 20세기 말 경에 동아리 게시판에서 후배의 글에 대한 댓글로서 제가 투고했던 글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문장들이 대부분 반말인데다가 간혹 동아리 사람들끼리만 아는 사항들(이름 등)이 대뜸 등장하며, 심지어 2인칭으로 지칭하는 구절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만, ‘후배에게 쓴 댓글’이었던 점을 감안하며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약
한국인의 이름일지라도 로마자로 표기하는 이상 어디까지나 서양인들을 위한 표기이므로, 서양인이 읽고 발음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도록 배려함이 마땅하다. 이름을 구성하는 음절의 개수와 한글 글자의 수가 같다는 사실은 로마자로 표기할 때에는 전혀 의미가 없으며, 의미를 두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middle name과 관련된 오해 등 몇가지 이유로, 음절 사이에 공백을 두지 않고 이름을 하나로 붙여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과 이름의 순서는 서양인들로 하여금 동양의 순서를 알게 하는 것이 원론적이며 바람직하지만, 대다수의 서양인들이 동양 문화에 무지한 현재로서는 서양식 순서에 맞추어 표기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겠다. 또한 대문자를 활용하여 성을 드러내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2002년 4월 갱신 : 대문자를 활용해서 성을 드러내서라도 성과 이름의 우리식 순서를 유지하는 것이 역시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름 표기에 쓰이는 자모는 한글 로마자 표기법의 고지식한 원칙보다는, 실제로 native speeker들이 발음하는 유형에 맞추어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발음될 확률이 높은 자모를 택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한국 이름의 로마자 표기에 관해서는 몇 년 전 usenet에서도 많은 토론이 이루어진 바 있고, 나도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부분이라 조만간 내 나름의 자료를 정리해 볼 생각이다. 여기엔 간단하게 요약해서 쓰마.
일단 내가 생각하고 있는 기본 모토는 이렇다: 로마자 표기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자 사용자로 하여금 읽으라고 쓰는 것이다. 즉, 자동적으로 서양인들을 위한 표기가 된다고 하겠다. ‘한글 로마자 표기법’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이는 사람 이름을 표기하는 데에 맞추어 설계된 규칙은 아니다.
한글이나 한자로 우리 이름을 표기하면 이름 (성 말고) 부분이 대개 두 글자가 된다. 이 사실에 기초하여, 영문으로 자기 이름을 쓸 때 이름 부분의 두 음절을 띄어서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를들어 홍길동의 ‘길동’을 ‘Kil Dong’이라 쓰는 것이다.
위와 같이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Kildong’이라고 써야한다. 이렇게 써야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하나씩 따져보자.
지극히 원론적이고 개념적인 이유부터 들어보겠다. “Kil Dong”이라는 표기는 한글로 표현할 때 “길동”과 같이 두 글자가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싶은 마음에 쓰는 표기이다. 그러나 “길동”은 두 음절이고, 각각의 글자는 각각의 음절을 나타낼 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단위는 아니다. (물론 한자로 표기하면 각 글자가 의미를 갖겠지만, 그건 “學校”도 마찬가지다. “學”자와 “校”자가 각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學 校”라고 띄어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마자는 음소의 1차원 배열이며, 음절 사이에 공백은 들어가지 않는다. 여러 음절을 붙여서 써서 비로서 하나의 의미를 갖는 덩어리가 되면 그제서야 띄고 다음 단어(하나의 의미를 갖는 덩어리)를 쓴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Terry”라는 이름은 두 음절(Ter·ry [téri])이다. 한글로 쓰면 “테리”가 된다. 그렇다고 영미인들 중 이 이름을 “Ter Ry”라고 쓰는 사람은 없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름을 구성하는 단위는 하나의 의미를 갖는 덩어리가 최소 단위이지, 음절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진 않는다.
한글은 음소의 2차원 배열을 다시 1차원으로 배열하며, 하나의 2차원 배열이 종결되고 그 옆(1차원상에서 다음 위치)에 새로운 2차원 배열을 시작하는 기준은 음절이다. 이는 애초에 로마자의 세계에는 없는 규칙이다. 따라서 한글/한자로 쓸 때 두 글자(음절)가 된다는 사실은 영미인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고려하고픈 사항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이나 신경 쓸 뿐이다.
실제로, 동양권의 지명/인명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서양인들로서는, 영문 표기된 한국인의 이름을 여러번 본다고 할지라도 한국인들의 이름이 99%의 경우 two syllables로 이루어져 있다는 재미있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것이다. 모든 사람의 이름이 같은 갯수의 음절로 구성되리라는 황당한 발상을 과연 그들이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동양권에 대해 안다고 하더라도 주로 일본인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 일본은 한 개의 한자를 읽는 음절의 갯수가 대개 두 음절이지만 아닌 경우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 동양인의 이름도 서양의 이름처럼 음절의 갯수는 가변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한국인의 이름은 두 음절이다”라는 발상은 영미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름 사이에 공백이 있으면 그 공백 좌우에 있는 덩어리(단어)들이 각각 의미를 갖는 하나의 단위들이라고 오해한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에서 “홍” 한 글자는 성씨로서의 의미가 분명히 있지만, “길동” 부분은 “길”과 “동”으로 나뉜 상태로는 이름을 대변하지 못한다. 그러니 “길동”을 “Kildong”으로 붙여서, 이 두 음절이 합쳐져 하나의 단어로 취급받아야 비로서 이름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줄 필요가 있다.
“Kil Dong” 대신 “Kildong”으로 써야 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실용성 측면에서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 밝혔듯이, 로마자 표기는 결국 서양인을 위한, 서양인에게 읽게 하기 위한 표기이다. 그러니 표기는 서양식으로 해 두고 발상은 동양식 발상을 강요하는 “무늬만 로마자” 표기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기왕 로마자로 쓰는거라면 로마자 사용자(서양인)들의 발상으로도 충분히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배려함이 당연하다.
서양에는 middle name이 있다. 우리에겐 없는 개념이다. 나중에 성과 이름의 관계를 얘기할 때 다시 언급하겠지만, 사람의 이름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은 통털어 두 개의 단위(성과 이름)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발상은 한국인에게나 가능한 발상일 뿐이다. 서양인에게 있어서 이름을 구성하는 단위는 몇개인지 모른다. 두 개도 드물지 않고, 대개 세 개며, 심지어 네 개나 다섯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Last (family) name 외엔 전부 이름”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 아예 그런 발상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first와 last가 아닌 모든 부분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만일 자신의 이름을 Kil Dong Hong 이라고 적었다가는
Hey, Mr. Hong! May I call you ‘Kil’?
요딴 소리를 듣게 된다. 졸지에 이름이 “길”이 되는 순간이다. 위와 같은 발언을 한 서양인으로서는 그렇게 말하는게 당연하다. 그는 홍길동의 이름이 “Kil Dong Hong”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먼저 재빨리 Family name인 Hong(홍)을 확인한 후 확실히 새겨두고, 그 다음 사교적인 목적을 위해 first name인 Kil(길)을 확인한 후 이것도 기억해 둘까 고려한다. 여기까지 진행한 후 그는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숨 돌리며, 자신이 확인한 Hong과 Kil 사이에 있는 “Dong”이라는 중요치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혹시 이니셜로 “D.”라고는 기억해 줄지도 모른다. “Kil D. Hong”....)
위 2.1절에서 말했듯이 우리 이름은 명백히 “길동”이라는 두 음절이 하나의 덩어리로서 존재해야만 그 사람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조각 조각 짤려져서 한 조각은 first name, 한 조각은 middle name 하는 식으로 취급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Kildong”으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이건 조금은 핀트가 벗어난 얘기지만, “Kil Dong”이냐 “Kildong”이냐를 논할 때 꼭 나오는 제안 중 하나이므로 여기서 함께 얘기해 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름 사이에 하이픈을 넣는 것에 반대한다. 위 2.1절과 2.2절에서 주장한 바를 모두 충족시키면서, 한국인으로서 한글로 표기한 상태(두 음절임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상태)를 외국인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아쉬움까지 포기하지 않게 해 줄 방안으로 하이픈이 거론된다. 즉, “Kil-dong”이라고 쓰면 한 덩어리로 표현해야 한다는 기본 이치에도 맞고 이름중 일부가 middle name으로 오인받을 일도 없으면서, 이 이름이 한글로 “길동”이라고 쓰여진다는 사실과 매치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긴 하다. 실용성 측면에서, 하이픈을 우리 식대로 해석하자면 위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하이픈을 서양인들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여 줄 것인가다. 나는 서양인도 아닐 뿐더러 서양인들과 많은 접촉을 해 보지도 않았지만, 지금까지 이와 관련해 접수된 정보들로 판단해 보건대 대다수의 정상적인 서양인들이 이름에 하이픈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It’s crazy!
라고 반응한다. 한때 내 영어회화 선생이던 사람 두 명, Mr. Bozak과 Mrs. Penrose는 모두 위와같이 반응했다. 그 외에 usenet 토론 당시 많은 이들이 전해주기를, 그들도 같은 반응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즉, 기본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위 하이픈이 뭘 뜻하는지 결국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일단 첫 인상이라고 할까… 어쨌든 하이픈이 들어간 이름에 대한 첫 반응은 “어째서 이름에 하이픈이 들어가 있느냐? 이상하다!”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름에 하이픈이 들어가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하이픈에 관한 얘기는 이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단순히 음절을 구분하기 위한 하이픈에 관한 얘기는 여기서 마치지만, 나중에 4.2절 ‘한글 로마자 표기법과 실제 발음 사이의 괴리’ 부분에서 하이픈 얘기가 다시 나온다. 한글 특유의 “발음에 구애받지 않는 표기” 때문이다.
“예외”라 함은 “Kil Dong”으로 적어야 하는 경우를 말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Kil Dong”으로 적어도 괜찮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미국 대사관 같은 데에 가서 “Kil Dong”으로 표기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하여 “Kil Dong”으로 써도 괜찮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건 예외 상황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미국 대사관의 직원들은 한국인의 이름 로마자 표기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고, 현재 확실하게 일원화되어있지 않아 중구난방인 로마자 표기에 이골이 나 있기 때문에 알아서 잘 처리해 주는 것 뿐이다. 이렇게 한국인의 편의를 봐주는 곳은 각국 대사관, 각국 주재 한국 대사관 (오히려 한국 주재 외국 대사관들보다 불친절하지만 어쨌든) 등 몇 안되는 곳들이다. 외국 공항만 해도 여권의 이름 표기와 비행기표의 이름 표기가 띄어쓰기 측면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시비를 거는 일이 허다하다고 들었다.
서양인 입장에서 “동양(orient)”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나라는 중국 혹은 일본이고, 그 다음으로 떠올리는 나라는 역시 중국 혹은 일본 중 첫번째로 떠올리지 못한 나머지 한 쪽이다. 한국은 세번째나 되면 감지덕지다. 대개 세번째도 되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특히나 이름 표기에 관해서는, 기업 이름, 중요 거래처 인사들 이름, 자신의 상관 이름, 심지어 좋아하는 만화 작가 이름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이름이 자주 접하는 동양인 이름 1순위에 꼽힌다고 한다. 문제는, 일본은 이름의 로마자 표기에 관해서 거의 완성된 일원화 표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고 (그들로서는 이 작업이 우리보다 쉬울 수 밖에 없었다. 후술하겠다), 이미 서양인들의 뇌리에 한자 지명·인명 문화권의 이름 로마자 표기에 관한 표준 정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꼭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일본 이름은 우리보다 더 많은 음절로 구성된다. 많은 경우에 성 네 음절, 이름 네 음절로 구성되며, 각각 세 음절 혹은 다섯 음절일 경우도 아주 많고, 이 이외의 갯수의 음절로 구성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 하이픈을 사용하거나 공백을 삽입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들어 이름이 “宮崎 駿 (미야자끼 하야오)”이라면, 로마자로는 당연스럽게 “Hayao Miyazaki”라고 표기한다. (위 표기는, 예시의 정확성을 갖추기 위해 방금 집에 소장하고 있던 アニメ-ジュ 編輯部編 “The Art of PORCO ROSSO” (붉은돼지 화보집)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드물지 않게 위 이름을 “Hayao Miyazaki” 대신 “MIYAZAKI Hayao”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내가 보기엔 이 표기도 일본에서는 거의 표준으로 정착되어 있는 듯 하다. 나름대로 타당성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성과 이름의 관계를 설명하는 3장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위 두 표기에 대/소문자의 차이 뿐만 아니라 성/이름의 순서 차이도 있음을 주목하라.)
어쨌든, 지금 이 2.5절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외국인은 일본 이름 표기에 익숙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oriental의 이름 표기도 위 일본식 기준에 맞추려 한다. 로마자 표기가 서양인을 위한 표기인 만큼 서양인의 이런 심리를 고려해야한다. 이는 “일본이 정한 표준을 우리가 왜 따라야 하는가”라는 배타적인 관점에서만 볼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정한 표준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검토해봐도 충분히 타당하고 잘 짜여진 표준이다. 물론 액면 그대로 한국인의 이름 표기에 적용하기에는 한국인 이름 특유의 요소들로 인한 문제점이 있으므로, 당연히 발전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 이름의 로마자 표기에 관한 표준 설정이 우리 경우보다 쉬웠던 몇가지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 그 중 이번 2장(이름의 띄어쓰기 문제)에 관련되는 내용만 여기에 정리해본다. 나머지 이유들은 각각 해당 문제를 논할 때 다시 언급하겠다.
우리 이름은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대충) 99%의 경우 (漢字 기준으로) 외자 성에 두자 이름이며, 발음상으로도 단음절 성에 이(二)음절 이름이다. 이로 인해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에도 “글자는 곧 음절, 음절은 곧 표기의 단위”라는, 외국인에게는 이해시킬 수 없는 우리만의 고정 관념을 만들어 냈다.
이에 비해 일본 이름은 기본적으로 (漢字 기준으로) 두 자 성에 두 자 이름지만, 변동이 아주 심해서 한 자 혹은 세 자짜리 이름이나 성이 쓰이기도 하고 게다가 발음상으로는 몇 음절인지가 이름마다 제각각이어서, 일본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어차피 “음절”이라는 기준은 로마자 표기에 있어서의 띄어쓰기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게다가 드물긴 하지만 이름자에 ん자 등이 쓰일 경우에는 카나로조차 음절수와 글자수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은 자연스럽게 이름 한 덩어리를 로마자로도 한 덩어리로 표현할 수 있었다. 우리처럼 “Kildong인가 Kil Dong인가”하는 논란 따위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안다.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쓸만한 대안이 있을 수 있다. Usenet에서 토론할 당시 나왔던 제안인데, 비록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진 않지만 꽤 타당성과 실용성이 있는 제안이다 싶어서 기억하고 있다.
“Kildong이냐 Kil Dong이냐” 라고는 했어도 “Kildong이냐 Kil dong이냐” 라고 한 적은 없다. 위 두 문장의 차이는 잘 들여다봐야 보일것이다. 딱 한글자, 그것도 대소문자 차이다.
이것을 그대로 응용해서 “KilDong”이라는 표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보자. 일단 개념상 공백이 들어가서 의미가 이상해진다든가, 일부가 middle name으로 오인받는다던가 하는 문제는 없다. 하이픈도 없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이름은 원래 대개 두 음절입니다”라는 어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표기이다. (usenet 토론 당시 끝까지 이걸 어필하는 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분들이 있었다. 취향이나 가치관의 문제이니 그들의 미련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 볼 때는 웃지 않을 수 없는 발상이다.
)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 대문자는 하이픈과는 달리 서양인들에게 변태적
인 짓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이미 서양 이름 중에도 Mac이나 Mc로 시작하는 이름들은 한 단어(?) 중간에 대문자가 섞이는 모양을 갖기 때문에 그들로서도 별로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표기가 아닐까 한다. 그러니 이름이 길동이라면 “KilDong”이라고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겠다.
Usenet의 han.talk.hangul에서 토론할 당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다. 가장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며, 따라서 주관적인 가치관이나 주장이 근거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니 반론의 여지도 많을 수밖에 없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서 그게 누구였는지까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박종대님 아니면 김대연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떤 분은 결국 끝까지 나와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었다. 이 문서에서 논하는 많은 요소들 중 대부분은 h.t.hangul에서 모종의 “결론”을 내렸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성과 이름의 순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취향과 정책이 양분된 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거는 이렇다: 이 글의 초반부에 썼던 내용을 또 한 번 반복하는 것이지만, 로마자 표기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자 사용자(서양인)를 위한 것이다. 기왕 표기를 한글이 아닌 로마자로 한다면, 서양인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서양인들은 대개 성을 뒤에 쓴다. 그리고 동양인은 성을 앞에 쓴다. 그리고 또하나의 서양식 표준으로서, “성, 이름”의 형식도 사용한다. 다행스럽게도(?) 동양이나 서양이나 성이 의미하는 바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같다. 성은 가계(친족)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이름은 그 안에서의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성과 이름의 의미가 동서양에 공통인 이상, 우리에게 있어서 만일 “홍”이 성이라면 서양인에게도 자신의 family name은 ‘Hong’이라고 확실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서양인을 위한 표기라면 무엇이 성이고 무엇이 이름인지 그들(서양인들)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써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글을 작성한 이후 약 2년이 흐른 2002년 현재 필자 의견이 좀 달라졌다. 사실 필자는 2000년 후반부터 필자의 이름을 ‘Reeseo Cha’에서 ‘CHA Reeseo’로 바꿔 쓰고있다. 즉, ‘HONG Kildong’으로 쓰고 있다. 나중에 이 글의 3.3절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예전에 유즈넷 토론 당시에는 필자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 표기를 현재에는 필자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칙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예전엔 현실을 택했었고 지금은 원칙(이상)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Hey, Mr. Kildong.”이라고 불리지 않기 위해 ‘Kildong Hong’을 택해야겠지만, 원칙적으로는 “Call me Mr. Hong, plz.”라고 되받아치는 한이 있어도 ‘홍길동’이라는 우리의 순서를 지키는 것이 이상적이다.
심지어는 “Hong Kil Dong”을 주장하신 분도 있었지만 “Kil Dong”에 관해서는 이미 2장에서 충분히 얘기했으니 이 얘긴 다시 하지 않겠다. “Hong Kildong” 을 주장하는 분들의 근거는 이런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아무리 로마자 표기가 서양인들 위한 표기라 하더라도, “동양인은 성을 앞에 표기한다”는 사실 정도는 서양인이 알아서 챙겨먹어야 한다. 그들의 사고 방식에 맞추는 것도 어느 정도지, 분명한 우리 이름을 뒤바꿔야 할 이유는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홍길동”이지 “길동홍”이 아니란 말이다! 동양식 순서에 관해 서양인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이 더 원론적이고 정당한 방법이다. 나는 분명히 한국에서 “길동” 혹은 “홍길동”이라 불린다. 아무리 서양인이라 하더라도, 이제와서 그들에게 “길동홍”이라고 불리우고 싶지는 않다!
당시 usenet에서 벌어졌던 이에 관한 토론들 중 대부분의 요소는 내가 원하고 주장했던 바 대로 대충 결론이 났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결국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위 주장도 십분 일리가 있는 얘기다. 처음엔 물론 국수주의나 쓸데없는 자존심 경쟁이 아니냐는 쪽으로 비건설적인 논쟁이 오갔지만, 시간이 갈 수록 위 주장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 주장에 대한 내 반박은 이랬다: “물론 자신의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당연히 죽었다 깨어나도 홍길동이다. 길동홍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건 한글이나 한자로 쓸 때, 혹은 한국인이나 동양인의 입으로 발음하고 호칭할 때 얘기고, 로마자로 써 놓고 서양인의 입으로 읽고 부르는 이상 Kildong Hong으로 불린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느냐? 나도 내 이름을 Reeseo Cha라고 쓰긴 하지만 절대 ‘리서차’나 ‘里西車’라고 쓰진 않는다.”
이에 대한 그들(”Hong Kildong”을 주장하는 이들)의 대응은: “한글이나 한자(漢字)로 쓸 때 ‘길동홍’이라고 쓰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로마자로 쓸 때에만 ‘Kildong Hong’이라고 쓰자는 얘기이기 때문에 문제가 안된다면, 반대로 서양인인 Bill Gates의 이름을 한글로 쓸 때에는 ‘게이츠 빌’이라고 써야하고 우리 (동양인) 입으로 그들을 부를 때에도 ‘게이츠 빌씨’이라고 불러야 맞지 않느냐?” 라는 것이었다.
맞다. 그들(”Hong Kildong”을 주장하는 이들) 얘기가 옳다.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실제로 앞으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결론을 내지 못했지만, 내 혼자 속으로 ‘무엇이 옳은가’에 관한 결론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표기법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즉, 나도 “Hong Kildong”이라고 쓰고 서양인들로 하여금 Hong이 성인 것을 알도록 만드는게 근본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럼 왜 나는 여전히 내 이름을 Reeseo Cha라고 쓰는가? 이것이 바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Hong Kildong”이 옳다는 마음속의 결론은 이상일 뿐이고, 현실적으로 당장 이렇게 표기를 하면 문제가 생긴다. 아직 대다수(우리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외국인들은 제외. 그들은 대다수도 아닐 뿐더러 이미 동양 실정에 익숙해진, 표본으로 선택하기엔 편파적이되어버린 사람들이다)의 서양인들은 동양식 이름 표기가 그들과 성/이름 순서가 반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의외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앞으로 먼 훗날 동양의 문화적 입지가 강화되어, 마치 우리가 서양식 이름 표기 규칙을 아무나 알고 있듯이 서양인들도 동양식 이름 표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에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당장 이상적인 표기를 실천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내 이름을 Reeseo Cha라고 쓰는 것이고, 이것이 현재로서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장 5절에서 일본의 경우를 얘기하면서 잠시 예로 들었던 만화영화 감독 宮崎 駿의 경우를 다시 보자. 스쳐지나가듯 “Hayao Miyazaki”와 “MIYAZAKI Hayao”의 차이를 언급했었다.
간단한 절충안이다. 이들은 각각
얘기였다. 이 두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성”에 해당하는 부분을 전부 대문자로 쓴다. 그리고 원한다면 이 부분을 앞에 둔다.
잠시 부연하자면, 위 단락 마지막 부분의 “원한다면”이 어떤 의미인가 의아해 할 듯 해서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Hayao MIYAZAKI”라는 표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이름 성’의 순서로 쓰고서도 성을 전부 대문자로 썼다. 얼핏 보면 의미 없는 일인 것 같지만, 사실 이렇게 쓸만한 이유도 있다. 우리 이름은 어느쪽을 앞에 쓰던 어느쪽이 성인지 사실 알아낼 방법이 있다. “단음절인 쪽”이 대개 성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끼리니까 아는 사실이지, 서양인들은 물론 심지어는 일본인들 중에도 한국식 한자 발음이 모두 단음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이름도 사실 외국인 입장에서는 어느쪽이 성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느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 이름은 표준이 정해져있기 망정이지, 만일 표준이 없었다면 자기들끼리도 로마자 표기로부터 어느쪽이 성인지 알기가 힘들다. (물론 일본에도 정해진 성씨가 있기 때문에 대충 알 수 있지만, 이름자에 성으로 쓰는 한자를 잘 조합하면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성도 이름도 모두 여러 음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대외(서양)적인 공식 문서를 제외하고는, 성을 어디에 쓰던 간에 어쨌든 성을 전부 대문자로 표현하길 즐겨한다. 이것이 알아보기 쉽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HONG Kildong”이라는 표현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물론 개중에 성격 나쁜
서양인들은 뻔히 대문자를 보면서도 그걸 이름으로, 뒤쪽것을 성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별 문제 없이 통하는 절충안이 아닐까 한다. 참고로 본인은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진 않다.
위 3.2절의 주장을 피력하던 분들 중 일부는 끝내 절충이나 상호의견 존중에 이르지 못하고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극단적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해 못할 주장도 아니다. 위와 같이 표기하는 이상, 서양인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원주민이나 인디언이 와서 보더라도 알파벳만 읽을줄 알면 100% “홍길동”이라고 불러줄 것이다. 절대 “길동홍”으로 불릴 일은 없겠지. 죽었다 깨어나도 “길동홍”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시던 분들의 마지막 목소리였으나, 이 주장을 길게 고집하는 분은 거의 없었다. 개중에 십분 양보한답시고 양보하여 주장한 표기로 “HongKildong” 혹은 “HongKilDong”도 있었다. (잘 보면 대문자가 섞여있다.) 내가 보기엔 결국 50보 100보지만 말이다.
뭐 이렇게 표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다. 하지만 꼭 해 주고 싶은 말은 (욕이 아니라 농담 삼아), “니는 애비 애미도 없냐?”다. Family name은 아예 포기한 표기 아닌가?
3.1절에서 Kildong Hong 외에 잠시 “Hong, Kildong”을 언급했었다. 이는 올림픽 전광판의 표기법으로 사용될만큼 명백한 표준 표기법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있다. 바로 컴퓨터나 network과 관련하여 RFC 문서들에서 정하고 있는 표준에 위배되거나, 위배되진 않더라도 좀 더 수고를 끼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E-mail(인터넷 전자우편)을 자주 다뤄본 사람이라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보내는 e-mail을 발송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밖에 없다.
요즘 나오는 많은 GUI 기반의 email client 프로그램이나 국내 BBS 통신망의 email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보지 못한 경우도 있겠지만, 원래 표준적인 전자우편 문서는 header와 body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문서의 맨 처음부터 시작해서, 최초로 빈 줄이 나올 때까지가 header, 최초의 빈 줄 이후로는 모두 body이다.) 그리고 header 부분에는 많은 종류의 header 메세지들이 한 줄에 하나씩 들어가있다. 대표적이자 필수적이며, 이름만 봐도 쉽게 뭔지 이해할 수 있는 헤더로서 To:, From:, Date:, Subject: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헤더들이 있어서, 이 편지가 누구에게 배달될 것인지, 누가 작성한 것인지 등이 나와있고 이에 따라 network 상에서 처리된다.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 To: 헤더에 받는 사람들 쭉 적되, 각각의 사람(주소)을 컴마(,)로 구분한다. 즉, 이런거다:
From: 차리서 To: 임재현, 공성림, 김영진, redhands@linux.sarang.net, nowlnx@nownuri.net, 김한상
이런 식이다. 각각의 컴마 사이에 있는 문자열이 *@* 형식이면 이를 주소로 판단해서 보내고, 만일 컴마 사이에 있는 문자열 중 *<*@*>* 형식이 있으면 꺾쇠괄호(<>) 안쪽의 문자열을 주소로 인식한다.
솔직히 말해서, 윗 단락에서 말한 규칙때문에 실제로는 이름을 “Hong, Kildong” 으로 써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잘못 만들어진 메일러나 sendmail은 오동작을 일으킬 우려
가 있다. 그래서 network 상에서 사용하는 명칭으로 “Hong, Kildong”은 별로 쓰고싶지 않은 표기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정선이가 말한 내용은 위 2, 3장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 4장에 정선이가 생각하던 문제가 들어있을 것이라 본다.
자모 표현에 관해서는 이미 한글로마자표기법이 있고, 관례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사람 이름에 쓰는 로마자만큼은 따로 고려할 사항이 좀 있다.
ㅏ, ㅗ, 등은 a, o 등 너무나 명백한 표기가 매치되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만 간추려본다.
영어 발음중에는 분명히 ‘어’와 비슷한 모음 발음이 있으나, 이는 영어만의 특유 발음인데다 이를 표기할만한 상주 모음이 없다. 게다가 강한 ‘으’ 발음은 아예 없다. 이 두가지를 표기하기 위해 특수 문자로서 각각 ŏ와 ŭ를 쓰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자 없는 경우에 대비하여 ‘어’는 eo로, ‘으’는 eu로 쓰는 걸로 정하고 있다. (내 이름인 차리서도 Reeseo Cha로 표기한다.)
‘우’는 기본적으로 한글 로마자 표기법에서는 u로 정하고 있다. 얄짤 없다. 한글 로마자 표기법 중 “oo”라는 모음 표기는 없다. ‘에’는 e, ‘애’는 ae, ‘이’는 i다. ee라는 표기는 정하고 있지 않다.
사실 당시 usenet에서 토론할 때에만 해도 나는 이 모음 표기를 충실히 따르는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아래 2절에서 다시 종합적으로 설명하겠다.
자음 중 단연 문제가 되는 것은 무성음 중 파열음 계열과 격음 계열이다. 예를들어 내 성인 “차”는 Cha라고 표기한다. 그러나 한글 로마자 표기법이 정하는 바로는, 유성음화되지 않은(즉, 어절의 첫머리에 시작되는) ‘ㅊ’을 Ch로 표현하며, ‘ㅊ’은 무조건 Ch’로 표현하게 되어있다. 즉, 내 이름은 Reeseo Ch’a가 올바른 표기라는 뜻이다. -_-;
원래는 이 자음 부분에 대해 쓸 말이 많았는데, 최근(약 한 달 전) 한글 로마자 표기법 중 이 자음 부분에 대한 개편이 있었던 관계로 생략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한글 로마자 표기법은 한국 내에서 한국인끼리 로마자 (우리 글자가 아니다) 표기를 원활히 하기 위한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혹은 명목상 외국인을 위한 표기임이 당연하지만 실제로 외국인이 하는 발음과 이 규칙 사이에는 괴리가 심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외국인은 한글 로마자 표기법 따위를 알리 만무하다. 다시 한 번 같은 얘기를 반복하게 되지만, 로마자로 표기하는 한국인의 이름은 외국인을 위한 표기이다!
먼저 모음부터 보자. 정선이의 이름을 예로 들겠다. Jeongseon인지 Jungsun 인지를 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생각에는 몇 명의 native speeker에게 위 단어를 써 주고 발음을 시켜보는 것이다. eo는 대부분 ‘어’ 모음 비슷하게 발음하지 않을까 싶다. u는 운이 좋으면 eo보다도 더 우리말의 ‘어’ 모음에 가깝에 발음하겠지만, 운이 나쁘면 ‘우’나, 심지어는 ‘유’로 발음할지도 모른다. -_-; 즉,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모음의 위치, 단어의 모양, 강세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얘기다.
“우” 모음도 마찬가지다. 준택이는 자신의 이름을 Joontaek으로 쓴다. 그리고 상윤이의 이름 표기는 Sangyoon이다. u를 쓰는 일은 드물다. 간단한 이치다. 위의 eo 모음이나 oo 모음은 각각 ‘어’, ‘우’로 발음됨이 명백하지만, u는 어찌 발음될지 기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음 쪽에도 여전히 남은 문제가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ng와 nk의 처리다. 예를들어 7기 김영인. Yeongin으로 쓰면 이게 대체 “영인”인지 “영긴”인지 “연긴”인지 알 수가 없다.
반대의 상황도 있다. 6기 박현경 누님의 이름을 보자. Hyeongyeong 이라고 쓰면 이게 대체 “현경”인지 “형영”인지 “형경”인지 알 수가 없다.
한글의 이응 받침은 원래 옛이응이었다. 음가가 사라진 아래아 등의 글자와는 달리, 옛이응은 글자는 사라졌으되 음가는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초성에 쓰이는 이응은 “음가 없음”을 나타내는 진짜 이응이다. 옛 문헌에 구별되어 쓰이던 두 글자가 단지 닮았다는 이유로 전혀 무관한 음가인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글자로 통합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옛이응 받침의 음가는 원래 ‘ㄱ’, ‘ㅋ’ 등과 마찬가지로 구개음 계열이다. 즉, 구개와 목구멍을 통해 나오는 소리라는 뜻이며 이 구개음 계열 중 유일한 순수 유성음이기도 하다. 따라서 로마자로 이응 받침을 나타내는 ng 표기는 유성음화된 g — 게르만 계열의 g를 뜻함. ny와 섞여버린 라틴 계열의 ng를 뜻하는 것이 아님 — 발음을 의미하고 그 음가를 간직한다는 뜻에서 매우 과학적이고 타당하다.
그러나 영어의 ng는 같은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가 너무 강하다. 우리 말로 “응애응애”를 해 보면 이것이 “으애으애”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애”에 연음되어 나타나는 이응 받침의 음가가 옛 이응의 음가인데, 영어에서는 이 음가가 격하게 바뀌어 아예 ‘ㄱ’이 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들어 singer는 “싱어”로서 ng의 음가가 옛이응의 음가와 거의 일치하지만, longer는 “롱거”로서 g의 음가를 죽이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영어에 있어서 ng의 음가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우리말의 이응 받침 혹은 니은 받침에 이는 초성 ‘ㄱ’을 표현하는 데에 애로가 따르는 것이다. 2장에서 하이픈 관련 얘기를 하다가 여운을 남겼었는데, 여기서 그 얘기를 다시 해야겠다. 이런 ng와 관련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하이픈을 써야하지 않을까 한다. 대문자를 쓰는 것이 더 보기 좋겠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들어 한국일보는 Hankook이 아니라 Han-kook 이라고 표기했었다.
일본어를 보면 모음이 a, i, u, e, o, ya, yu, yo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은 자음에 있어서도 유성음과 무성음의 변환 규칙을 확실히 문법적으로 정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의 이름를 로마자로 표기할 때 어떤 모음을 조합할지, 어떤 자음을 쓸지 고민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자모를 어떻게 조합하는가는 결국 한글 로마자 표기법 따위의 규칙에 얽매일 문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름이 제대로 불려지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표기일 뿐이다. 예를들어 7기 나유미는 한글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나면 Yumi Na로 표기해야 옳다. 그러나 확실하게 “유미”로 읽히기 위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유미는 자신의 이름을 Youme라고 쓴다. You와 me의 조합이다. 한글 로마자 표기법 나부랑이에 따르면 위 표기는 “요우메”가 되지만, 외국인은 한 번쯤 “유메”라고 읽었다가 대번 “유미”라고 제대로 읽어줄 것이다. 바람직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기왕 쓰는거 더 잘 쓰고 싶었는데, 빨리 외출해야해서 날림으로 쓰게되어 아쉽다. 사실 2장과 3장은 더이상 첨삭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하고 싶은 얘기는 충분히 다 했는데, 4장은 나중에 다시 손을 봐서 수정판을 올릴 계획이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는데, 벌써 두시 반이라 더이상 쓸 수가 없다. 이 최종 결론 부분도 가능한 모든 조합들을 열거하고 선택하는 장면을 넣어볼까 했는데 시간이 없군. 다음에 개정판을 올릴 기회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